구자형 법무법인(유한) 율촌 변호사
현실은 규정 따를 만한 기업 많지 않아
관련법령 지키도록 국가적 지원 필요해
노동 사건을 겪고 있는 기업과 이를 처리하는 국가기관들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인다. 노동법에서도 ‘절차’가 중요해서 가령 징계위원회 소집 절차가 잘못되면 그 이후 징계 사유와 징계 양정(징계 정도)이 아무리 완벽해도 징계는 무효가 되는 것이 원칙이다.
징계를 위한 내부 조사 과정의 문제로 기껏 받아둔 진술서를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노동위원회나 법원 입장에서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쉬운 사건’이 되어 버린다. 문제는 많은 기업들이 징계나 내부 조사 절차를 완벽하게 준수할 만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직원이 5명 이상이면 해고 제한 등 대부분의 노동법상 규제가 적용된다. 보통 직원 수가 20~30명 정도만 돼도 직장 내 괴롭힘 신고, 부당해고 구제신청 등 노동문제가 빈발하는 경우가 꽤 된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가 노동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조직을 갖추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법무법인이나 노무법인 등 외부에 의뢰하려고 해도 사건 수가 늘어나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직원 수 10여 명의 한 작은 회사에서 직원 한 명이 자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임직원을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신고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일단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들어오면 무조건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이 가해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조사할 사람이 없었다. 이 회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큰돈을 들여 노무법인과 법무법인에 각각 여러 건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를 의뢰해야 했다.
또 다른 작은 회사에서는 근로자의 심각한 근무 태만을 발견해 창사 이후 처음으로 징계를 하려 했다. 취업규칙을 찾아보니 본문에는 특정한 징계절차가 ‘별지’에 있다고 적혀 있지만 정작 ‘별지’가 없었다.
알아보니 처음 취업규칙을 만들 때 다른 곳에서 별지가 빠진 상태로 취업규칙을 받아왔고, 그대로 회람하고 신고까지 마쳤다고 한다. 차라리 ‘별지’를 인용하는 부분이 없었다면 괜찮을 텐데 ‘별지’대로 해야 한다고 정해 놓고 없으니 문제가 생겼다.
다시 별지 부분을 보완해서 취업규칙을 수정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란 이슈가 생겼다. 전체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새로운 문제를 겪게 됐다.
징계 절차는 대기업도 쉽지 않다. 한 대기업 생산직 근로자가 기분이 나쁘다며 지게차를 몰고 와 경비원들이 안에 있던 회사 경비실을 들이받은 사건이 있었다. 경비원들은 긴급히 대피했고 경비실은 크게 파손됐다.
그러나 이 생산직 근로자에 대한 징계는 결국 법원에서 절차 위반으로 무효라는 판결을 받았다. 해당 근로자는 사건 이후 구속됐는데, 회사가 구속 기간 중 징계를 진행함으로써 근로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도록 한 사규(단체협약)를 위반했다는 게 이유다. 법원은 형식상 규정 위반이 있다면 내용은 볼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절차를 위반한 징계사건이 법원이나 노동위원회에 가게 되면 내용을 볼 필요 없이 자동으로 무효인 ‘쉬운 사건’이 돼 버린다. 항상 사건에 치여 사는 판사들이나 조사관들이 오히려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설령 반가워하지 않더라도 판사나 조사관 개인이 달리 해 줄 일도 없을 것이다.
분명 기업 입장에선 징계 목적이나 사유뿐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만 영세한 회사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얼마나 절차를 준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에게 시험을 잘 보라고 하기 전에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 것처럼, 국가의 입장에서는 쉽게 사건을 처리했다고 좋아하기 전에 절차를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지원도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