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지구를 푹푹 찌게 한 주범, 엘니뇨가 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3일(현지시간) 보도자료를 통해 "엘니뇨 현상이 종료될 조짐을 보인다"며 "올해 말에는 라니냐 현상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엘니뇨는 적도 부근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현상인데요. 라니냐는 그 반대입니다.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지는 현상을 말하죠.
지난해는 '지구가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됐습니다. 그 배경에는 엘니뇨 현상도 자리 잡고 있는데요. 통상 엘니뇨는 온난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지목되곤 합니다. 반면 라니냐는 지구 기온 상승을 일정 부분 억제하는 효과를 낸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죠.
그러나 엘니뇨가 소멸, 라니냐가 찾아온다고 해서 올여름을 비교적 쾌적하게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순 없습니다. WMO는 "온난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못 박으며 위기감을 드리웠는데요.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엘니뇨가 어떤 영향을 미쳤고, 기후학자들이 다가올 라니냐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엘니뇨는 1997~1998년, 2015~2016년에 발생했던 엘니뇨에 이어 세 번째로 강력한 엘니뇨였습니다.
WMO 등 다수 기관에서 "지난해가 기록상 가장 더운 해였다"는 평가가 나온 바 있지만, 평가에 포함된 기간이 일정치 않고 초기 기온계측 기록이 있는 19세기 중반 이후 200년이 채 안 되는 탓에 우려가 전면적으로 와닿진 않았죠.
그러나 지난달엔 "지난해 여름이 기원후 2000년 동안 북반구에서 가장 더웠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충격을 자아냈습니다. 저명 과학저널 '네이처'에는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 지리학과, 체코 국립과학아카데미 기후변화 연구소, 마사리크대 지리학과, 영국 케임브리지대 지리학과 공동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실렸는데요. 연구팀에 따르면 북반구 북위 30~90도 지역의 2000년간 6~8월 지표면 기온을 재구성한 결과, 지난해 여름 기온이 1850~1900년 평균보다 2.07℃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기간 가장 추웠던 536년 여름보다 거의 4도나 더 따뜻한 것으로도 분석됐죠.
연구팀이 활용한 건 나무의 '나이테'였습니다. 나무가 자랄 때 날씨가 추우면 나이테의 간격이 조밀해지고, 따뜻하면 성글어집니다. 과거 기온에 따른 연도별 정보가 차곡차곡 쌓이는 셈이라, 2000년까지 확장된 범위로 과거 기후를 추정할 수 있는 겁니다.
연구팀은 나이테를 통해 6세기 소빙하기, 19세기 초 소빙하기 등 지난 2000년 사이에 특히 기온이 낮았던 시기가 대규모 화산 폭발에 이어졌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화산에서 분출된 황 성분의 먼지가 햇빛을 가리면서 지표면 냉각 효과를 낸 거죠.
또 특히 따뜻했던 것으로 분석된 시기는 대부분 엘니뇨 현상이 발생한 시기와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팀을 이끈 얀 에스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 교수는 "온실가스로 인한 온난화는 엘니뇨 현상으로 인해 추가 증폭돼 폭염은 더 길고 심해지고, 가뭄 기간도 연장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겨울 한국이 유달리 따뜻하고 눈·비가 잦았던 원인 중 하나도 엘니뇨입니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서태평양에서 대류 활동이 평년보다 덜 이뤄지고, 필리핀해 부근과 일본 동쪽에 고기압성 순환이 강화됩니다. 이에 우리나라로 고온다습한 남풍이 불면서 높은 기온, 많은 강수량을 보이는데요. 반대로 호주, 인도네시아 등 서태평양 지역에서는 한랭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가뭄이 들 수 있습니다.
온난화가 식탁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카카오 생산지인 서아프리카에 폭염과 폭우가 닥치면서 생산량이 급감하자, 지난달 카카오 국제 선물 가격은 t당 1만1800달러를 넘어섰는데요. 1년 전과 비교해 3.9배 가까이 오르는 등 4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반대로 커피 최다 생산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엔 가뭄이 들면서 커피 생산량이 줄었고, 원두 가격도 오름세를 보였죠.
라니냐는 엘니뇨의 반대인 만큼, 지구 기온 상승을 일정 부분 억제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라니냐가 발생하면 열대 중앙 태평양과 동태평양에 비가 적게 내리는데요. 이때 남아메리카의 페루·칠레 지역은 가뭄에 시달리게 됩니다. 반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서태평양의 동남아 지역에는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 예년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립니다. 호주 북부에도 폭풍우가 몰아치며 폭우가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 동북아 지역에는 강추위가 찾아올 수 있죠.
엘니뇨로 인해 물가 인상 압력이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올 하반기 라니냐까지 발생한다면, 물가 관리에도 비상이 걸릴 전망입니다. 미국 남부, 중남미 지역에 가뭄이 들고 동남아시아와 호주 지역에 폭우에 따른 홍수가 빈번해지면서 콩과 밀, 옥수수 등 곡물 생산량이 크게 감소할 수 있기 때문이죠.
WMO 예측센터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시작된 엘니뇨가 잦아들고 라니냐가 도래할 가능성은 올해 6∼8월엔 50%입니다. 그러나 7∼9월엔 60%로 오르고, 8∼11월에는 70%까지 증가하죠.
엘니뇨가 종료되더라도, 장기적 기후변화가 끝나진 않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라니냐의 냉각 효과를 온난화가 상쇄하면서 기온은 여전히 오름세를 보일 거라는 건데요. 코 배럿 WMO 사무부총장은 "지구가 열을 가둬두는 온실가스로 계속해서 뜨거워질 것"이라며 "온난화로 인한 장기적인 기후변화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앞서 라니냐는 2020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나타났는데요. 3년간 지속된 '트리플 딥' 라니냐에도 지난 9년간 지구 평균 기온은 관측 사상 가장 높았습니다. 라니냐가 닥친 해였지만, 2020년 지구 평균 기온은 역대 세 번째로 높았죠.
우선 기상청은 올여름께 엘니뇨가 쇠퇴하더라도, 국내 기온과 강수량엔 특별한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엘니뇨에서 중립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날씨에 일관된 경향성은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요. 지역 고유의 기후 특성과 함께 인도양과 대서양 해수면 온도, 북극 해빙, 대륙 눈 덮임 현상 등과의 원격상관(대기·해양의 흐름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혼합돼 다양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상청은 엘니뇨가 쇠퇴하는 해 여름철엔 전지구적으로 동아시아 북부, 북미 서부 지역은 평년보다 낮은 기온 분포를 보이며, 우리나라는 일부 남부 지역에서 기온이 평년보다 높고 일부 중부지역에서 강수량이 평년보다 많은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엘니뇨에서 라니냐로 전환될 때 한반도 남쪽에 있는 필리핀해 등 서태평양의 대류 운동이 강해질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나라엔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화될 수 있는데요. 북태평양 고기압은 폭염이나 폭우를 부르곤 하죠.
WMO의 전망대로 올해 안에 라니냐가 발생한다면 한국엔 매서운 한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라니냐가 발생할 때 통계적으로 한국은 겨울 기온이 평년보다 낮아집니다. 한반도 북동쪽에 저기압이 형성되고, 북반구에서는 저기압일 때 바람이 반시계 방향으로 불면서 한반도에 차가운 북풍이 쏟아지죠.
강수량도 줄어들 수 있는데요. 라니냐가 발달한 2021년 12월부터 2022년 2월까지 겨울 강수량은 전국 단위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후 가장 적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국 강수량은 13.3㎜로 최근 30년 평균치인 평년 강수량(89㎜)의 15%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엘니뇨, 라니냐 자체를 문제로 보긴 어렵습니다. 이상기후도 아닌 자연스러운 기후변동인데요. 문제로 거론되는 건 엘니뇨, 라니냐가 온난화를 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기후도 더 극단적인 양상을 띠고, 홍수, 가뭄, 폭염, 폭우 등 자연재해의 피해도 커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안심할 수만은 없습니다. 딥티 싱 미 워싱턴주립대 환경학과 교수 연구팀은 2022년 2월 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에 라니냐로 인해 가뭄이 20세기 때보다 10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는데요. 연구팀은 남아시아, 북중미, 그리고 한국 등 동아시아를 콕 집어 언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