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형사처벌엔 ‘감형’ 요인…韓 재판은 ‘별개’ 문제
44억7383만 달러…벌금‧환수금 납부 합의
당초 52억6000만 달러‧원화 7조3000억서↓
테라폼랩스 가상자산 증권거래 ‘금지’ 조항
권 씨는 상장기업 임원‧이사 재직도 막혀
SEC “테라폼랩스, 영원히 폐업시킬 것…
증권法 회피하려는 모든 이들에 본보기”
가상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 핵심인물 권도형(33) 테라폼랩스 대표와 발행회사 테라폼랩스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와 44억7382만8306달러(한화 약 6조2000억 원) 규모의 벌금 및 환수금 납부에 12일(현지 시각) 합의했다.
세부 내역들을 보면 △SEC가 추산한 테라폼랩스 부당 순이익과 판결 전 이자 4억6695만2423달러를 합한 35억8687만5883달러 △권 씨에게 민사상 벌금 1억1000만 달러 및 그 이자 1432만196달러 △테라폼랩스에 민사상 벌금 4억2000만 달러 등을 비롯해 테라폼 측 총 금전적 구제 금액이 44억7382만8306달러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암호 화폐와 관련한 가장 큰 규모의 벌금”이라고 평가했다.
15일 본지가 입수한 뉴욕 소재 미(美) 연방 남부지방법원 판결 제청문과 그 증거로 첨부된 양 당사자 합의서에 따르면, SEC는 테라폼랩스와 권 씨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이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며 뉴욕 연방남부지법에 최종 판결을 제청했다.
‘테라‧루나 사태’는 권 씨가 만들어 ‘안전하다’고 주장했던 가상화폐 테라‧루나 가치가 2022년 5월 ‘제로(0)’로 폭락해 투자자들이 거액을 잃은 사건이다. SEC는 테라‧루나 폭락으로 투자자가 거액을 잃게 한 데 대한 책임을 묻고자 같은 해 11월 민사 소송을 냈다. 앞서 배심원단은 올해 4월 6일 “테라폼랩스와 권도형이 사기 혐의에 책임이 있다”고 평결했다.
6조 원대 민사 합의는 “권도형과 테라폼랩스가 사기적 부정거래에 책임이 있다”는 뉴욕 연방법원 배심원단 평결에 따라 그 후속 조치로 구체적인 피해보상금 액수를 산정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美 송환 땐 ‘합의금’ 형벌 선처요인 계산 깔려
이호재 법무법인(유한) 율촌 수석 전문위원은 “SEC는 미국의 증권감독원에 해당하는데,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과 달리 미 SEC는 직접 행정제재를 가할 수 있고 나아가 기소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미국 증권 시장에서 행정적‧사법적 전권을 갖는 감시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 수석 전문위원은 “한국은 과태료 등 행정처분을 내릴 때 처분근거 법에 부과 기준이 도식화돼 있지만, 미국 정부는 국민을 위해 기업 등에 소송을 내면서 벌금이나 개선 명령 등 행정 벌 수위를 두고 법규 위반자와 협상을 벌이는 민사 소송과 유사한 구조를 밟는다”라고 부연했다.
실제 SEC와 권도형은 벌금 등을 정하는 과정에서 양측이 생각하는 금액에 차이가 컸다고 한다. 권 씨 측은 100만 달러(약 14억 원)를 내겠다고 했다. 반면 SEC는 52억6000만 달러(약 7조3000억 원)를 요구했다. 항목별로는 △과징금과 이자 47억4000만 달러 △테라폼랩스에 민사 벌금 4억2000만 달러 △권 씨에게 민사 벌금 1억 달러다.
최종 합의된 액수는 권 씨보다는 SEC가 제시한 규모에 더 가깝다. 평결에서 권도형의 잘못이 인정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SEC는 뉴욕 연방남부지법에 보낸 합의 승인 요청서에 “권 씨가 보유한 스위스 은행 계좌와 피스네트워크(PYTH) 코인 등을 통해 합의금을 납부할 예정”이라며 “만약 합의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면 SEC는 압력을 행사해서 최대한을 받아내겠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2월 SEC는 권 씨가 테라폼랩스를 운영하며 사들인 비트코인 약 1만 개를 빼돌렸다고 발표했다. 이날 현재 비트코인 1개 가격은 9400만 원 수준이다.
“투자자‧선순위 채권자 중 한국인,
SEC로부터 피해 구제 받을 수도”
토큰증권발행(STO)에 증권성을 인정하는 미국은 가상자산을 자본시장법상 규율하고 있다. 미 연방 뉴욕 남부지방법원 판결 제안문에 의하면, 테라폼랩스의 가상자산 증권 거래 ‘금지’ 조항이 담겼다. 권 씨는 상장기업 임원이나 이사로 재직하는 일도 막히게 된다.
SEC는 뉴욕 남부지법 승인 요청서에 “이번 합의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에게 최대한 자금을 돌려주고 테라폼랩스는 영원히 폐업시키겠다”며 “합의가 승인된다면 뻔뻔한 위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뿐 아니라 연방 증권법 적용을 받는 암호 화폐 자산에 대한 새로운 행동 기준을 만들어 연방 증권법 요건을 회피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한 억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제출했다.
권 씨는 도피 행각을 벌이다 작년 3월 몬테네그로에서 여권 위조 혐의로 체포된 뒤 계속 현지에 구금돼 있다. 권 씨는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기소된 상태로, 신병이 어디로 인도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권 씨 측이 거액의 합의금을 내겠다고 한 배경에는 미국으로 인도될 경우 SEC에 낸 합의금이 형사법적 처벌 형량을 양정할 시 선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이 수석 전문위원은 “권 씨가 만약 미국에서 형사재판을 받게 된다면 합의금이 양형에 고려될 수 있다고 본다”면서 “우리나라 법원 판단처럼 미국 법원도 피해 구제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감형 인자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 검찰 역시 권 씨를 기소한 상황이어서 이번 SEC와의 합의와는 별도로 벌금액과 추징금 규모를 미국 검찰이 독자적으로 산출할 수 있으나, SEC와 이미 합의된 벌금 액수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권 씨는 미 뉴욕 연방검찰에 상품사기, 금융사기, 시세조작, 증권사기 등 8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블룸버그는 “미국에서 권 씨가 받고 있는 혐의의 최고 형량을 전부 합치면 110년 형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수석 전문위원은 특히 “SEC가 이번 합의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에게 최대한 자금을 돌려준다는 방침을 세운 이상 테라폼랩스에 투자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투자자 또는 직원 임금, 금융기관 대출금 등 투자금보다 먼저 갚도록 하는 선순위 채권자들 가운데 한국인 피해자가 있다면 SEC로부터 피해 구제를 받는 사례가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피해자는 20만여 명으로 피해 규모는 3000억 원대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투자자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 피해액은 50조 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금융감독원에서 20년 넘게 재직하다 지난해 6월 초 율촌에 합류한 이 수석 전문위원은 자금세탁 방지업무 전문 감독관으로, 금감원에서 ‘자금세탁 방지(AML‧Anti-Money Laundering)’ 업무만 7년 가까이 책임진 이 분야 최고 전문가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자금세탁 방지 감사를 강화해온 미 금융감독당국이 △2017년 NH농협은행 뉴욕지점(벌금 1100만 달러) △2020년 IBK기업은행 뉴욕지점(벌금 8600만 달러) △2023년 아메리카 신한은행(벌금 2500만 달러) 등 한국계 은행에 세 차례 대규모 벌금 조치를 내릴 당시 국내 금융기관 보호에 기민하게 대처한 베테랑이다.
서울남부지검, 2333억 추징보전
미국은 SEC라는 행정청에 처분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대신에 법원을 통한 사법적 통제 장치를 두고 있다. SEC가 권 씨와 합의 내용에 관해 뉴욕 연방남부지법 판결문 승인을 제안한 이유다. 양자 합의 사항을 놓고 판사로부터 사법부 검증을 거치는 셈이다.
그러나 권 씨가 한국으로 송환될 경우 국내 형사재판에서는 미국에서의 배상 여부가 양형에 참작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 또한 제기된다.
부장 판사 출신 남현(사법연수원 34기) 법무법인 세움 변호사는 “국내 피해자들을 위한 피해 보상은 별개 문제”라며 “한국 내 형사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국외 피해자들에 보상 정도는 한국 법원 양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 변호사는 ‘테라‧루나’ 폭락 사태에 연루된 신현성 전 차이코퍼레이션 대표의 변호인을 맡고 있다. 신 전 대표는 권도형 대표와 테라‧루나 발행사 ‘테라폼랩스’를 공동 설립한 인물이다.
한국은 서울남부지검이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부패재산몰수법)에 의거해 권 씨 재산에 추징 보전을 청구했다. 법원은 이 중 2333억여 원을 인용했다. 권도형이 우리 법원에서 유죄를 확정 받을 경우 피해자들이 피해 금액을 일부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