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하루 1만 명 환자 응급진료 못 받을 것”
“정부는 응급실 문만 열려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어야 응급실이 작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절반도 작동되지 않고 있습니다. 응급실 위기를 넘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수준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최근 일산백병원 응급실에서 본지와 만나 현재 응급실 상황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의사들 사이에서 이른바 ‘멋진 의사’란 인식이 있다고 말문을 연 이형민 회장은 “전공과목을 좁고 깊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자를 보더라도 적절한 치료를 해줄 수 있이서”라고 설명했다. “멋있어 보여서” 응급의학과를 선택했다는 이 회장은 “환자를 보는 게 보람차고 재미있었다. 힘든 걸 알고 왔기 때문에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처우로 인해 그만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응급처치로 중증환자를 살리는 것만 바라보고 응급실에서 의사로 생활하는 것을 꿈꿔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정부의 의료개혁에 반발하며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나서다. 현 상황은 아무리 응급조치를 잘한다 해도 중증환자의 배후진료를 봐줄 의사가 없어 소위 ‘응급실 뺑뺑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추석 연휴 기간 응급실 진료는 더 비상이다. 응급의학의사회에 따르면 평일 기준 하루 평균 2만 명가량의 환자가 응급실을 찾는다. 작년 추석 연휴에는 하루 평균 3만 명까지 늘었다. 이 회장은 “2만 명의 환자가 찾고 있는 지금도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없는데 3만 명이 온다면 1만 명을 돌볼 여력이 없지 않겠는가. 위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정부는 전국 응급실 대부분이 24시간 운영되고 있어 다소 어려움은 있지만, 의료체계 붕괴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부가 잘못된 판단하는 이유에 대해 이 회장은 “의료현장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면서 “의료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의료계 의견을 무시하며 정책을 만드니 이 모양 이 꼴을 면치 못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군의관과 공보의를 파견해 응급실 의료공백을 막겠다는 정부 결정에 대해선 “안전한 방안이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 회장은 “제가 세종에 파견된다 해도 그 병원 시스템에 적응하려면 1~2주가 걸린다. 군의관이나 공보의가 오면 뭘 할 수 있겠는가. 보통 1년 차 전공의가 들어와도 적응하기까지 석 달이 걸린다고들 한다. 적극적으로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피력했다.
이달 초 윤석열 대통령이 의정부성모병원 응급실을 찾아 “응급의료가 필수의료 중에 가장 핵심인데 국가에서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돕지 못했다”며 “그동안 정부의 수가 정책이나 의료제도가 이러한 어려움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보상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회장은 “말로만 공정을 논하지 말고 기본부터 다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문제만 덮어놓으면 앞으로의 비전, 희망이 없다”며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은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인정과 신뢰만 주면 된다. 정부는 그저 돈만 올려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 잠깐 와서 본다고 뭘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라고 토로했다.
지난해까지 국내 누적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2778명이다. 전 세계에서 미국과 호주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정부가 추진 중인 의대 증원과 의료개혁 정책이 없었다면 향후 10~15년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는 4500명까지 증가할 예정이었다.
이 회장은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건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권역응급의료센터의 법적인 인력 기준은 5명이다. 법만 따지면 1800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처럼 응급실을 운영하려면 1만5000명의 의사가 더 필요하다. 어떠한 정책을 세우느냐가 중요하다. (의사 수를 늘리기 전에) 정부가 어떤 응급실을 만들 것인지를 먼저 따져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터뷰 중에도 이 회장은 경증, 중증환자 분류, 환자 상태 확인 등 틈틈이 응급실 업무를 봤다. 이 회장은 “제가 돌봐야 하는 환자가 16명이었는데 이제 17명이 됐다. 불가능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라며 “전공의들이 메꿨던 자리가 비니 일손이 부족한 건 당연하다. 17명의 환자를 보기 위해선 3~4명의 의사가 근무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더 급한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하다 보니 기다리는 환자들도 많다. 길게는 2시간 넘게 기다리는 환자도 있었다.
의료계에선 이대로 정부가 의료개혁을 강행하면 응급실 자체가 소멸될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이 회장은 “지금 상황이 지속한다면 내년 2월 새로 의대생과 전공의가 들어올 때까지 버티면 나아질까 하는 기대를 하기 어렵다. 버티고 버티다가 한 군데의 응급실이 무너지면 주변에 영향을 주게 되고, 차츰 대한민국에서 응급실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실제로 일부 병원에서는 인력 빼 오기를 할 정도로 전문의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의들이 옮기고 병원에 의사가 부족해지면 차례차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재 일하고 있는 전문의 수는 한정적이고, 앞으로 전문의 배출에도 차질이 있어서다. 어느 병원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다 보니 젊은 의사들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의사를 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지난달 30일 열린 정기학술대회에서 ‘한국 면허로 캐나다에서 의사하기’, ‘미국 의사 되기’ 등의 강연을 열었다. 이 회장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현실에 더 이상 한국에서 응급의학과 의사를 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젊은 의사들을 위해 강연을 마련했다. 외국에 가겠다는 후배를 적극적으로 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의료계의 요구와 목소리가 반영된 제도 개선은 필수다. 그간 응급의학의사회는 △응급실 과밀화 문제 해결 △취약지 인프라 개선 △사법리스크 면책 등을 우선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시해왔다. 그래야 한국에서 응급의학 의사로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회장은 “다른 어떠한 대책은 다 쓸데없다. 10~20년간 응급실 진료체계 개선을 주장해왔지만 정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정부의 의료개혁은 철학도 실체도 없다”면서 다시 한번 정부의 실질적인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