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공주님이 강림했던 주말 상암벌. 21~22일 양일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상암 경기장)에서 회당 5만 명, 총 1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아이유 공주님이었죠.
초대형 스크린, 드론쇼, 불꽃, 리프트 등 아낌없이 쏟아부은 듯한 자본의 홍수 속 아이유는 자신의 100번째 콘서트를 화려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공연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아이유 콘서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호소하는 간증, 공주님의 강림, 도와주는 자연 무대장치, 관람 온 연예인들 등 다양한 극찬의 피드로 가득했는데요.
하지만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도 속출했죠. 싸늘한 그들의 걱정은 단 한 가지였는데요. “상암 잔디는 괜찮은가요?”
상암 잔디는 9월 열린 A매치(축구 국가대표 평가전)인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 이후 연일 언급됐는데요. 이 ‘상암 잔디 논란’의 시작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캡틴 손흥민의 ‘아쉬움’이었습니다.
5일 팔레스타인전을 0대 0 무승부로 마친 뒤 손흥민은 상암 경기장 잔디 상태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죠. 그는 “기술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 볼 컨트롤이나 드리블에서 어려움이 있다. 홈에서 할 때 개선됐으면 좋겠다”라고 지적했는데요. 심지어 상대 팀인 팔레스타인 마크람 다부브 감독도 “우리가 봤을 때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잔디 상태가 100%가 아니었다. 이 잔디에 적응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 부끄러움을 동반했죠.
6일 뒤 손흥민은 재차 상암 잔디를 또 등장시켰는데요. 오만 원정에서 3-1로 승리한 뒤 손흥민은 “그라운드 상태가 너무나도 좋아서 선수들이 플레이할 때 더 자신 있게 한 것 같다”며 “이런 부분이 홈 경기장(국내)에서도 개선됐으면 좋겠다”라고 일갈했습니다.
2001년 개장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은 ‘2002 한일월드컵’을 떠올리는 축구의 성지였는데요. 한일 월드컵 이후로도 이 경기장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고, 프로축구 K-리그1 명문 FC서울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이 홈구장이기도 합니다.
6만6704석 규모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축구 경기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종교 행사에도 개방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는데요. 운영 주체인 서울시설관리공단은 A매치나 K리그 FC서울 경기가 없는 시기에 콘서트를 유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림픽주경기장이 지난해부터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이곳 상암 경기장이 서울 시내에 거의 유일한 대규모 공연장이 되어버렸죠. 그러면서 이 잔디 문제가 계속 제기돼 왔습니다.
한때 이 상암 경기장은 ‘좋은 잔디’로 외국 선수들에게 극찬을 받았던 바 있는데요. 서울시설공단은 2021년 10억 원을 들여 하이브리드 잔디를 새로 깔았습니다. 천연잔디 95%와 인조 잔디 5%를 섞은 켄터키 블루그래스라는 품종의 한지형 잔디인데요. 잔디 식재층 모래를 전면 교체해 배수 성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죠. 지난해 쿠팡플레이 시리즈를 위해 내한한 맨체스터 시티 관계자들 또한 이를 인정했는데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 직전 엄청난 폭우가 내렸지만, 완벽한 배수시설 효과로 불과 40분 만에 경기가 재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랑스러웠던 잔디’가 일명 ‘논두렁 잔디’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해 8월 ‘2023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잼버리)’의 일환으로 갑작스럽게 열린 ‘K팝 슈퍼 라이브’ 공연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죠.
운동장 위에 대형 무대를 설치하면서 잔디가 무거운 무게에 눌려 훼손된 데다 골대 부근을 포함해 그라운드까지 무대를 설치해 잔디 훼손 논란을 자초했습니다. 또 관중들이 그라운드석에 착석해 가수들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잔디는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렸죠.
문화체육관광부는 잔디 회복을 위한 예산까지 편성하며 긴급복구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는데요. 이후에도 각종 공연과 축구경기가 이어지며 ‘회복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거기다 올해 정말 너무했던 폭염까지 겹쳤는데요. 한지형 잔디의 생육 적정 온도는 15~25도여서, 그 이상의 고온이면 생육이 정지되죠. 매일 30도를 넘는 폭염이 이어진 올해 여름에 잔디 밀도는 60% 수준까지 떨어진 상황입니다.
결국, 손흥민의 발언 이후 이미 예정됐던 아이유 콘서트로 불똥이 튀게 된 건데요. 국민신문고와 서울시 등에 ‘10월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북중미 월드컵 예선 경기까지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잔디 관리를 위해 다가오는 아이유 콘서트를 즉각 취소해 달라’는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죠.
아이유 소속사도 잔디 보호를 위해 메인 스테이지와 돌출 무대를 잇는 브리지 없이 스테이지를 두 개로 나누고, 잔디 보호대를 설치하고, 스태프 사전 교육까지 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는데요. 예매자들에게도 ‘플로어 관객의 경우, 서울월드컵경기장 내 잔디 보호를 위하여 잔디 보호재 사이로 꽂힐 가능성이 있는 신발(하이힐, 굽 있는 신발 등)의 착용을 삼가 부탁드린다’라는 안내 문자를 보내기까지 했죠. 하지만 그래도 잔디 훼손 논란을 피할 수 없자 아이유의 팬들은 “아이유가 무슨 잘못을 했냐”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이런 논란 속에 대한축구협회(KFA)는 다음 달 15일 예정된 이라크와의 북중미 월드컵 예선 홈 경기를 용인미르스타디움에서 치르기로 했는데요. 3만7000석 규모의 용인미르스타디움에서는 지난해 여자 대표팀 A매치를 치른 적이 있고, 현재 수원 삼성이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증폭되자 서울시는 14일 보도자료를 통해 내년부터 콘서트 등 문화행사에는 그라운드석 판매를 제외하고 대관을 허용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는데요.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은 아닙니다.
유럽은 한국과 달리 대체로 프로축구 구단이 구장을 소유하고 있는데요. 잔디가 중요 상품인 만큼 구단들은 시즌이 끝나면 잔디를 교체하고 잔디 관리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등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있죠. 하지만 지자체가 구장을 관리하다 보니 큰 수익을 안겨다주는 공연 개최를 포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죠.
즉 관리 주체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한 건데요. 대형 공연장이 부족한 상황에서 상암 경기장의 콘서트 개최가 불가피하다면 명확한 책임을 진 쪽이 잔디 관리 등 정비 투자에 적극적인 필요가 있다는 의견들이 나옵니다. 대관 시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필수죠.
‘상암 잔디’는 예전의 그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향후 수년간 축구팬과 K팝 팬을 모두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극복 과정’을 유심히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