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인물란이 모두 여성으로 가득 채워진 드라마가 첫 방송을 시작합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여성 국극’을 조명한 작품인데요.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조연 남자배우를 찾아볼 수 있는 주말극. tvN 새 토일드라마 ‘정년이’입니다.
‘정년이’는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화한 작품인데요. 2019년부터 네이버 웹툰에 소개됐죠. 한국의 시대극 웹툰으로 보기 드문 ‘여성 주제 웹툰’으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인기 웹툰이 드라마화 된 건데요. 드라마 제작 소식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실제 ‘정년이’를 그린 작가가 ‘정년이’를 그릴 때 모티브로 삼았던 배우가 ‘정년이 역’으로 캐스팅되며 기대감을 끌어올렸죠. 바로 김태리 배우인데요. 김태리 또한 10일 열린 ‘정년이’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웹툰을 즐겨 읽는 편이다. 보통 주인공을 따라가며 읽는데 ‘정년이’는 제 얼굴과 제 말투로 읽혔다”라며 “나중에 제가 연기한 ‘아가씨’를 모티브를 하셨다고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고 영광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직후 소리를 해서 부자가 되려 국극단에 들어온 전라남도 목포 출신 윤정년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데요. 넉살 좋은 새내기 연구생의 모습에서 점차 어엿한 국극 배우로 성장해가는 ‘정년이’의 모습뿐 아니라 정년이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국극계 간판스타 문옥경(정은채 분), 라이벌 허영서(신예은 분) 등과의 관계도 흥미진진합니다.
무엇보다도 여성이 전면에 나서는 대놓고 여성극이라는 점이 화제인데요. 작품 속 여성 국극단인 ‘매란국극단’ 내 단원과 연구생들만 30명 가까이 되는데, 당연히 모두 여성입니다. 사업부의 고수, 극작가, 부장 정도만 남성 조연들로 채워졌죠. 이는 ‘대한민국 최초’다 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인 데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여성들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는 진취적인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많은데요. 그렇다면 이 ‘정년이’는 페미니즘 작품일까요?
‘정년이’가 뛰어든 여성국극은 그 시작부터 페미니즘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현재는 많은 대중에게 다소 부정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이 당시는 여성들이 견뎌야 했던 ‘낮은 지위’를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죠.
그 당시 국악원에서 여성 명창들의 권리는 ‘권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도 민망했는데요. 워낙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시대이기도 했고, 대부분의 여성 명창들이 기생 양성소를 통해 소리꾼이 되었다는 것이 그 지위를 더욱 낮추는 이유이기도 했죠. ‘정년이’ 속 ‘매란국극단’의 왕자님과 공주님인 문옥경과 서혜랑 또한 기생 출신이었습니다.
이에 여성 국악인 30여 명이 192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며 ‘여성국극’의 시대를 열었는데요. 195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이들의 인기는 요즘 ‘아이돌 문화’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는데요. 바로 ‘육성 시스템’입니다. 단원과 연구생들은 마치 스타가 되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하고 회사 연습생이 되는 과정과 같죠. 심지어 ‘굿즈’도 판매했는데요. 남녀 주인공(물론 둘 다 여자)의 사진과 그림을 담은 단순 제품이었지만, 수많은 여성 팬의 응원 속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들의 인기는 오늘날 아이돌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죠.
특히 왕자님인 문옥경이 인기는 작품 속에서 팬과 가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는데요. “꼭 한 번이라도 옥경 언니와 결혼사진을 찍고 싶다”라는 애원 때문이었죠. 당시 인기 있는 남자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수없이 당했던 일이었다고 말하는데요. 심지어 ‘혈서 팬레터’를 받는 일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성국극’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맛볼 준비를 마친 현재, 원작 팬들의 아쉬운 소리도 들려오는데요. ‘정년이’ 속 페미니즘의 핵심인 ‘퀴어 페미니즘’이 제외됐다는 겁니다. 성적 실천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인데요. 동성애와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퀴어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대중적인 ‘네이버 웹툰’ 소재라 하기엔 ‘정년이’는 이 동성애적 요소를 듬뿍 담고 있는데요. 앞서 여러 번 설명한 왕자님과 공주님도 실제 커플로 등장합니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로맨스 관계인 듯한 묘사가 많은데요. 작가도 이를 인정했죠.
이런 터라 드라마화된 ‘정년이’에서 ‘권부용 역’이 삭제됐다는 점이 원작팬들의 원성을 듣고 있죠. 원작 웹툰에서 권부용은 메인캐릭터 중 하나인데요. 극단 소속이 아님에도 섬네일에 들어가 있는 주요인물이죠.
권부용은 여성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로 ‘정년이’의 1호 팬이자 정년이와의 로맨스가 그려지는 인물이죠. ‘여성국극’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작품으로 권부용의 대본이 뽑히기도 하는데요. 여성들끼리 서로 ‘멋있는 사랑’을 하는 장면을 그리며 다시 ‘여성국극’의 인기를 끌어올립니다.
실제로 드라마보다 먼저 오프라인으로 나온 작품 창극 ‘정년이’에서도 권부용의 이야기는 그대로 실렸는데요. 이 같은 비판에 정지인 PD는 “부용이 캐릭터에 대한 고민은 제가 (연출로)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제가 들어오기 전에 결정을 앞둔 상태였다”라며 “원작을 보지 않은 시청자들도 수용할 수 있도록 생각하며 메인캐릭터를 부득이하게 삭제하게 됐는데 저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만큼 국극단과 각 캐릭터의 배우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었다고 생각한다”고 해명했습니다.
부용 서사를 다른 캐릭터에 녹였다는 이야기에 원작 팬들의 불만은 더 커졌는데요. 이는 ‘페미니즘’ 드라마에서 ‘페미니즘’을 덜어낸 것이 아니냐고 말이죠.
그런 가운데도 여성 배우들로 가득한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기대는 여전한데요. 시청률 또한 궁금해지죠. 드라마 ‘정년이’로 풀어갈 여성국극과 페미니즘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 이야기 속 막을 열 ‘정년이’의 첫 방송을 기다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