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자동화기기(ATM) 관련주들의 주가가 급등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 업무보고에서 "리디노미네이션 관련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라고 언급한 것이 하나의 발화점이 됐다. 이어 다음 달 13일에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리디노미네이션을 논한다’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할 계획이어서 화폐 개혁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한 나라에서 통용되는 모든 화폐에 대해 실질 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조치다. 예를 들어, 1000원을 1원으로 표기하는 식이다. 한 국가의 경제 규모가 커지고, 오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량을 표현하는 숫자의 개수가 많아질 때, 회계상의 불편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이 도입된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할 경우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이 높아지고 지하 자금의 양성화로 인한 세수 증대 효과가 발생하는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다. 반면,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사회적 혼란도 적지 않다. 화폐 단위가 바뀌면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할 확률이 높다. 아울러 새로운 화폐 제조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들고, 국가 전체적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교환해야 하는 불편이 수반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리디노미네이션을 두 번 실시했다. 1953년 2월 신구 화폐 환가 비율을 100대 1로 조정했고, 1962년 6월 환가 비율을 10대 1로 리디노미네이션했다. 근래에는 2003년 1월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 10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화폐제도 선진화 방안’을 보고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관련 논의는 무산됐다.
현재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다. 국격에 맞게 화폐 단위를 조정해야 한다는 여론과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팽팽히 부딪치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 도입에 대해 뉴스랩부 김정웅 기자와 나경연 기자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메리카노 가격은 ‘3.5’…생활 속 ‘리디노미네이션’
나경연 기자(이하 나): 리디노미네이션은 이미 생활 속에서 자체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지금 바로 시행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죠. 요새 카페에 가서 메뉴판을 보면 ‘3.5’ 혹은 ‘4.0’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손님들은 해당 숫자가 3500원과 4000원을 나타낸다는 것을 다 알고 있고, 이런 것들이 화폐 개혁이 필요한 하나의 이유가 되죠. 이제는 10원 밑의 단위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 아닐까요?
김정웅 기자(이하 김): 네 말도 맞아. 사람들은 3.5라는 숫자만 봐도 그게 3500원이라는 것을 알아. 그런 메뉴판도 많아졌고. 그런데 굳이 화폐 개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처럼 유지하더라도 사람들이 메뉴판을 알아보는 것에 문제가 없고, 대부분 사람이 현금 대신 카드를 쓰기 때문에 계산상의 불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꼭 지금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할 이유를 못 찾겠어.
나: 물론 상점에서 소비자는 카드를 내밀고, 점원은 카드를 긁으면 되니까 불편한 점은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돈을 거래할 때나 장부를 정리할 때는 0이 많은 것이 큰 불편으로 다가와요. 1962년 리디노미네이션 이후 58년 동안 0의 개수만 계속 늘어났어요.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화폐 개혁을 할 수 있을까요? 계속 미루다 보면 때를 놓치는 것 같아요. 15년 전 노무현 정부 시절, 화폐 개혁에 대한 논의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이뤄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흘러왔어요. 지금 시기를 놓치면 또 언제까지 지연될지 알 수가 없죠.
김: 모든 일에는 투입되는 비용에 대비해 얼마의 이익이 나올지에 대한 계산이 필요하다고 봐. 리디노미네이션은 투입 대비 산출되는 이익이 그리 크지 않아. 국민이 화폐 개혁을 통해 느껴야 할 사회적 혼란과 모든 국가적 시스템을 바꾸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숫자로 환산하면 천문학적 수치가 나와.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서 얻어지는 생활 속 편리함은 아주 소소해. 1000원이 1원이 됐을 때 실질적으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장점을 알려주지 않으면 사회적 합의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거야.
◇국가적 위상과 직결…네 자릿수 환율, OECD 국가 중 유일
나: 일단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수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달러당 네 자릿수 환율 국가에요. 달러와 환율이 비슷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상징성이 있죠. 미국 달러, 캐나다 달러, 유로화 모두 비슷한 환율을 갖고 있잖아요.
김: 난 말야. 국가적 위상이 국민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는 결과에는 나도 동의해. 하지만 그런 것들이 국민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단순히 국가적 위상이라는 측면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걸.
나: 한국은 무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잖아요. 무역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면 무역 거래에 큰 강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이라는 선진국에서 만든 물건, 즉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거예요. 신뢰가 높아지면 외국 투자자로부터 투자금이 몰리게 될 것이고, 특정 기업이 투자금으로 사업을 시작하면 더 많은 채용을 창출해 내겠죠. 결국, 국가 경쟁력은 그 나라의 국민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고 봐요.
김: 글쎄. 투자자들, 구체적으로 환 투자자들은 투자할 때 특정 국가의 환율을 보고 판단하지 않아. 우리 같은 일반 시민들이야 전문성이 없으니까 환율을 보고 투자 상대를 정하겠지만, 큰돈을 만지는 환 투자자들은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봐. 그래서 리디노미네이션이 투자자들에게 어떤 투자 욕구를 불러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다만, 관광객들에게는 환전 시 편리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은 생기지.
◇해외 사례는? 짐바브웨, 물가 치솟아 ‘혼란’
나: 리디노미네이션의 긍정적 효과가 증명된 국가가 터키에요. 터키는 2005년 1월 1일 화폐 가치를 종전 대비 100분의 1로 낮춘 신리라화를 발행하며 물가 안정에 성공했어요. 덕분에, 2004년부터 2007년까지 경제성장률이 평균 7%를 웃돌았어요. 2004년까지 유엔 회원국 화폐 중 달러당 가치가 가장 낮았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유익한 정책이죠.
김: 물론 터키는 성공해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지만, 리디노미네이션에 실패한 국가들도 살펴봐야 하지 않겠어? 짐바브웨는 2009년 1조 대 1 비율의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지만, 물가 폭등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북한도 마찬가지야. 물가가 불안한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화폐 개혁만 밀어붙이면서 사회 혼란만 계속되고 있지. 신중해야 하는 이유야.
나: 노무현 정부 당시 박승 한은 총재가 원화를 1000대 1로 절감해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면 8조6000억 원의 이익이 난다고 분석했어요. 자기앞수표 발생 혹은 관리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이죠. '0'이 필요 없어진 사회를 받아들일 때가 왔어요. 언제까지 혼란의 비용만 얘기하면서 회피할 수 없는 문제에요.
김: 하지만 혼란의 비용이 일반 국민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설 것 같아. 예를 들어 아파트 한 채가 3억8000만 원이라고 해봐.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38만 원이 되겠지? 이러면 집값이 너무 저렴해 보여서 금세 40만 원으로 오르게 돼 있어. 물가 상승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내 입장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우리 월급 통장이야. 예를 들어 월급이 200만 원이라면 2000원으로 입금되겠지. 300만 원이라면 3000원이 들어올거고. 그 심리적 허망함을 너는 감당할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