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업, 부동산업 등 여러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 A. 그는 중국과 홍콩 등 해외에서 번 소득을 신고하지 않고 해외 비밀 계좌에 숨겨놓았다. '123blue'처럼 숫자와 이름으로만 이뤄진 계좌였다. 이렇게 미신고한 소득세만 수십억 원.
만일 10년 전이었다면 A의 돈은 아무도 모른 채 비밀 계좌에 얌전히 잠들어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난 7일 국세청은 그의 해외 계좌를 찾아, A에게 과태료 수십억 원을 부과하고 그를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국가 간 금융 정보 교환 협약을 통해 스위스, 홍콩 등의 해외 비밀계좌를 확인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이날 국세청이 밝힌 역외탈세 혐의자는 총 46명에 이른다.
다큐멘터리 '스위스 계좌를 팝니다'(Falciani's Tax Bomb, 2015)는 이 정보 교환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금융 비밀주의'에 균열을 낸 한 인물의 궤적을 따른다. 그의 이름은 에르베 팔치아니. 그의 내부 고발은 굳게 잠겼던 스위스 비밀 계좌의 문을 열고, 공고한 금융 비밀주의 벽을 허물었다.
이제는 과거의 유물이 된 금융 비밀주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68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많은 위그노 신교도들이 스위스로 건너가 은행업을 시작했다. 1815년 스위스가 영세 중립을 보장받자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스위스를 찾았다. 잦은 혁명과 전쟁으로 불안한 시기, 중립국 스위스는 이들에게 안전한 금고였다.
1920~1930년대 대부분 국가에서 소득세가 도입되자, 전 세계 부호들의 돈이 스위스로 몰렸다. 그러자 스위스는 1935년 스위스 은행법(Bankgesetz)을 도입해 금융 비밀주의를 못 박아 버린다. 이 전략으로 스위스가 전 세계의 많은 돈을 끌어들이자, 후발 주자들이 생겼다. 싱가포르, 홍콩 같은 아시아 금융 허브부터 카리브 해 연안 작은 국가들까지 조세회피처로 변신했다.
금융 비밀주의에 균열을 낸 팔치아니는 스위스에 있는 HSBC 프라이빗 뱅크의 IT 전문가였다. 세계 각국에서 세금을 피하고자 모인 비밀 계좌 내역이 모두 그의 손안에 있던 셈이다. 그는 2006년부터 2년간 무려 30만 개가 넘는 고객의 계좌 정보를 빼내 복사했다. 파일의 개수만 1만5000여 개, 크기는 100GB(기가바이트)가 넘었다. 2008년 그는 이렇게 모은 정보를 전 세계 금융 당국에 뿌렸다.
사실 처음부터 아무 대가 없이 정보를 금융 당국에 넘길 계획은 아니었다. 팔치아니가 처음 향한 곳은 레바논이었다. 그는 가명을 쓰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한 채 그곳 은행에 계좌 정보를 팔려했다. 하지만 레바논 은행들은 비밀 계좌 정보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한 은행가는 스위스 과세당국에 팔치아니를 신고했다.
스위스 경찰은 2008년 12월 22일 제네바에서 팔치아니를 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하지만 인권을 중시하는 스위스 법 체계상 그를 오랫동안 구금할 수 없었다. 그는 몇 시간의 심문 끝에 풀려났고, 그 즉시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위스 사법 당국은 갖은 방법으로 팔치아니를 되찾으려 했지만, 프랑스는 자국의 탈세범을 잡고자 그를 보내지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는 팔치아니의 폭로에 기폭제가 됐다. 금융 기관의 모럴 헤저드가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이듬해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은 입을 모아 "금융 비밀주의 철폐"를 외쳤다. 회의 직후 OECD는 비협조적인 조세회피처 리스트를 발표해 압박을 이어갔고, 스위스 등 조세 회피 국가들은 타국에 금융 정보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은 2010년 FATCA(해외금융계좌신고법)를 도입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금융회사라면 미국 납세의무자가 보유한 5만 달러 이상의 계좌를 보고하도록 했다. 이후 2014년 10월 OECD에서 해외 은행 계좌 정보를 과세 당국과 교환한다는 내용의 협약이 통과되며 금융 비밀주의는 막을 내렸다. 양자 또는 다자간 정보교환이 가능한 국가는 올해 5월 기준 151개국에 달한다.
금융 비밀주의는 막을 내렸지만, 팔치아니가 폭로한 계좌 주인들에게 온전한 조세 정의가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가 폭로한 정보가 불법 수집된 탓에 많은 유럽 국가에서 제대로 된 사법적 처벌과 과태료 부과가 이뤄지지 않았다.
사실 팔치아니의 내부 고발을 두고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직업윤리를 저버린 도둑질'이라는 비판과 함께 '탈세를 폭로한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라는 칭송이 공존한다. 그는 이를 두고 "저는 도둑이 맞아요. 모두를 해롭게 하는 법을 어겼죠"라고 말한다.
탈세 역시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다큐의 마지막, 한스 루돌프 메르츠 스위스 전 재무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돈은 물과 같아서 틈만 생기면 흘러 들어간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탈세는 일어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