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정기주주총회 시즌 동안 상정된 주주제안 안건 99건 중 이사·감사 선임 안건이 53건(53.5%)으로 가장 많았다. 의결권 자문사 서스틴베스트는 행동주의펀드들이 단기적·일회성 요구에서 긴 호흡의 중장기 투자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재계는 “기업 성장을 위한 목소리보다 경영권 분쟁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 많은 행동주의펀드들이 기업 경영이나 경영권 분쟁 등에 끼어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성장하고 그렇게 키운 파이(이익)를 제대로 나누는 것이 주주가치 제고의 선순환 방식”이라며 행동주의펀드의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낸다.
3월 15일 열린 삼성물산 주총. 행동주의펀드의 검은 속내를 볼 수 있었다. 시티오브런던 등 5개 외국계 사모펀드가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을 요구하며 ‘울프 팩(wolf pack·늑대 무리처럼 여러 펀드가 뭉쳐 한 기업을 공격하는 것)’ 전략을 펼쳤다.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대로라면 벌어들인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주에게 돌려줘야 한다. 투자 등 기업의 미래를 위해 써야 할 돈을 주주에게 다 줘버리는 셈이다. 소액주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배당안건에선 의결권 있는 주식의 77%, 자사주 매입 안건에선 82%가 행동주의 펀드들 요구에 반대하거나 기권했다.
행동주의펀드는 한국 자본시장에 빛과 그림자를 남겼다. 배당과 자사주 소각에 인색했던 한국 기업의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오너 등 지배주주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우진 서울대학교 교수는 “주주 제안 이후 표 대결로 가지 않고, 사전에 경영진과 협의를 통해 원만하게 진행된 건들이 많이 늘었다”며 “이런 면에서 행동주의가 예전보다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발전하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하지만 행동주의펀드는 눈앞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해 기업 성장 여력을 갉아먹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는다. 소액주주와 국민연금이 이들을 외면한 데서 이를 짐작하게 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행동주의펀드들은 주주 제안이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소액주주들과 공유하지 못했다”면서 “아무리 좋은 주주제안이라도 소액주주들의 지지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기업의 변화와 성장을 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주총에서는 국민연금이나 기관 등의 표가 유효할 수 있도록 행동주의펀드의 설득 작업이 필요했는데 올해는 조금 미흡했다”고 평했다.
시장에서는 주총장이라는 싸움터에서 주목받는 반짝스타가 아닌, 기업과 오래 함께하는 친구를 주문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여기에 맞춰져 있다. 정부는 기업들이 자발적인 가치 제고 노력을 통해 자본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아 성장하고, 그 과실을 투자자가 함께 누리며 재투자하는 선순환적 자본시장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행동주의가 살아남을 방법은 뭘까.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기업 성장(실적)과의 동행’을 외친다.
황 연구위원은 “(행동주의펀드가)현재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임원 선임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업의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 자본 효율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학교 교수는 “기업의 실적은 주가와 연관돼 있으므로 당연히 기업의 실적이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은 지난해 5월 기업 밸류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2012년 아베노믹스를 통해서 기업의 체질 개선에 대한 방향을 줬다”며 “파격적인 양적완화로 엔저를 유발하고 엔저를 통해 기업수익을 증가시키는 패러다임을 10년 전에 이야기했고, 그것 다음에 밸류업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과의 소통도 강조한다. 황 연구위원은 “주총에서 표 대결을 하는 주주 제안은 최후의 수단 격이어서, 사전에 다양한 수단들을 통해 의견을 조정해 가는 노력이기업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기업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방향성제시 노력이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