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블랙리스트의 기적

입력 2024-10-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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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주 기자 ssp@
한강의 노벨문학상 쾌거와 봉준호의 칸영화제 및 아카데미 석권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해 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거부하는 여성에 대한 한국 가부장의 폭력성을 다뤘고,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각각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광주 5·18과 제주 4·3을 다뤘다. 봉준호는 ‘기생충’을 포함한 여러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빈부 격차 등 계급 문제를 지적했다.

한강이 2016년 ‘채식주의자’로 부커상을 받았을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탄핵 정국 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가 발간됐는데, 블랙리스트에 한강의 이름이 확인됐다. 국가 폭력을 고발한 ‘소년이 온다’의 내용이 당시 정권 입장에서는 불편했던 것이다. 실제로 한강은 해외 도서전 및 각종 국가 지원 사업에서 배제됐다.

봉준호는 천만 관객을 돌파한 ‘괴물’이 흥행하면서 반미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한강에 ‘포름알데히드’라는 독극물을 무단으로 방류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이와 관련해 봉준호는 당시 “반미영화라고 단순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미국에 대한 풍자나 정치적인 코멘트가 있다”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이명박 정부 시절 영화진흥위원장은 이창동이 연출한 ‘시’의 시나리오가 각본이 아닌 소설 형식이라는 이유로 지원사업 심사에서 0점을 줬다. 하지만 이창동은 ‘시’로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정부에서 박하게 평가한 영화가 상을 받자 당시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각본상은 작품상이나 연기상에 비해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라며 평가 절하했다. 이창동 역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이었다.

아도르노, 쇼펜하우어, 벤야민 등 수많은 철학자는 예술이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언어라고 말했다. 특히 아도르노는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고 비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예술인은 부당한 차별과 폭력을 예술적 방식으로 고발하고,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존재다. 예술이 있기에 인간은 힘겨운 인생살이 속에서 잠깐이나마 위로를 받는다.

예술인들이 진실로 조명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런 어두움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이웃과 연대하고자 했던 인간의 청아한 마음이다. 그런데도 예술이 정쟁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정치 문화가 후진적이라는 증거다. ‘블랙리스트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웃어넘기면 안 되는 이유다.

송석주 기자 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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